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년 9월 29일 ~ 1810년 7월 16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의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그는 죽을 때까지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오갔다. 그의 그림들은 바로크 회화에 조형적인 영향을 미친 극적인 조명 사용과 육체적, 감정적 인간 상태에 대한 사실적인 관찰을 결합하는 것으로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카라바조는 테네브리즘으로 알려지게 된 키아로스쿠로의 극적인 사용으로 세밀한 물리적 관찰을 이용했다. 그는 이 기법을 지배적인 스타일적 요소로 만들어 피사체를 밝은 빛줄기와 어두운 그림자로 고정시켰다. 카라바조는 종종 폭력적인 투쟁, 고문, 죽음을 특징으로 하는 결정적인 순간과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캔버스에 직접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라이브 모델들과 함께 빠르게 작업했다. 매너리즘에서 나타난 새로운 바로크 양식에 대한 그의 영감을 주는 영향은 심오했다. 그의 영향력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 유세페 데 리베라, 잔 로렌초 베르니니,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직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예술가들은 "카라바기스트" (또는 "카라바게스크")와 10대 화가 또는 "그림자주의자"로 불렸다. 카라바조는 20대 때 로마로 이주하기 전에 밀라노에서 화가로 훈련을 받았다. 그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폭력적이고, 예민하고, 도발적인 남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져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는 나폴리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금 그의 세대의 가장 저명한 이탈리아 화가들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607년 그는 몰타와 시칠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1609년 그는 나폴리로 돌아와 격렬한 충돌에 휘말렸다.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문점은 그의 불규칙하고 기이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610년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는 도중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했지만, 그가 살해당했거나 납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카라바조의 혁신은 바로크 회화에 영감을 주었지만, 후자는 심리적 사실주의 없이 그의 키아로스쿠로의 드라마를 통합했다.[토론 – 토론] 스타일은 발전하고 유행은 바뀌었고 카라바조는 인기가 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서양 미술의 발전에 대한 그의 중요성은 재평가되었다. 20세기 미술사학자 앙드레 베른 조프로이는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시작되는 것은 매우 단순하게 현대 회화이다."
생애초기 (1571년 ~ 1592년)
카라바조(Micelangelo Merisi 또는 Amerigi)는 밀라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오(Fermo Merixio)는 밀라노의 동쪽 35km와 베르가모 남쪽에 있는 카라바조의 마르체스의 가정 행정가이자 건축가였다.1576년 가족은 밀라노를 황폐화시킨 역병을 피해 카라바조(카라바조)로 이주했고, 카라바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1577년 같은 날 그곳에서 사망했다.이 예술가는 카라바조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가족은 스포르차 가문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고 카라바조의 생애 후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운명이었던 강력한 콜론나 가문과 관계를 유지했다. 카라바조의 어머니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모두 가난하게 키워야 했다. 그녀는 나중에 1584년에 사망했는데, 같은 해에 그는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4년간의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카라바조는 도제가 끝난 뒤 밀라노-카라바조 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지만, 베네치아에 방문해 페데리코 추카리가 나중에 그를 모방했다고 비난한 조르지오네와 티치아노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밀라노의 예술 보물들과, 단순함과 자연주의적인 세부사항에 대한 관심을 중요시하고 로마 매너리즘의 양식화된 형식과 웅장함보다는 독일의 자연주의에 더 가까운 양식인 롬바르드 미술과 친숙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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