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밀라노 시대 (1508년 ~ 1513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1508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돌아와 산타 바빌라 교구에 있는 포르타 오리엔탈레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살았다. 1512년, 레오나르도는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를 위한 승마 기념비를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이는 프랑스군을 밀라노에서 몰아낸 스위스, 스페인, 베네치아 연합군의 침공으로 막을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1513년에 메디치 가문의 바프리오 다다 별장에서 몇 달을 보냈다. 1513년 3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조반니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1513년 9월부터 1516년까지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동했던 사도 궁전의 벨베데레 안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레오나르도는 한 달에 33두카트의 용돈을 받았고, 바사리에 따르면, 도마뱀을 비늘에 찍어 은으로 장식했다. 교황은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주제의 그림 의뢰를 주었지만, 그 화가가 새로운 종류의 니스 개발에 착수했을 때 그것을 취소했다. 레오나르도는 병에 걸렸는데, 이는 그가 사망하게 된 여러 번의 뇌졸중 중 첫 번째일 수도 있다. 그는 바티칸 시국의 정원에서 식물학을 배웠고, 교황이 제안한 폰티누스 습지 배수에 대한 계획을 세우도록 의뢰받았다. 그는 또한 성대에 관한 논문을 위해 시체들을 해부하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리에게 주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515년 10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탈환했다. 레오나르도는 12월 19일 볼로냐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1세와 레오 10세의 회담에 참석했다.
왕궁에서의 레오나르도
1516년, 레오나르도는 왕궁의 왕궁 근처에 있는 클로 루세 장원의 사용을 허락받고 프란치스코의 직책에 들어갔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방문했던 그는 왕이 로모란탱에 세우려고 했던 거대한 성읍에 대한 계획을 세웠고, 기계적인 사자를 만들었는데, 이 사자는 미인대회 도중 왕을 향해 걸어갔고, 지팡이에 맞아 가슴을 열어 백합꽃 군락을 드러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그의 친구이자 견습생인 프란체스코 멜지와 동행했고, 총 10,000 스쿠디의 연금을 지원했다. 그의 생전에 알려진 유일한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연구 (1517년경)의 뒷면에 알려지지 않은 조수가 그린 스케치이며, 조반니 암브로지오 피지노가 그린 그림이다. 후자는 1517년 10월 루이 다라곤의 방문 기록과 더불어, 레오나르도가 65세 때 오른손이 마비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는 그가 모나리자와 같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를 나타낼 수 있다. 그는 결국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까지 어떤 능력으로 일을 계속했다.
죽음
151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프란시스 1세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임종 때 뉘우침으로 가득 찬 한탄하며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신과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 바사리는 말년에 레오나르도가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식을 받기 위해 사제를 불렀다고 말한다. 바사리는 또한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일 수도 있지만, 왕이 레오나르도의 머리를 그의 품에 안았다고 기록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테이퍼를 들고 다니는 60명의 거지들이 레오나르도의 관을 따라갔다. 멜지는 주요 상속인이자 집행인이었으며, 레오나르도의 그림, 도구, 도서관, 개인 소지품뿐만 아니라 돈도 받았다. 레오나르도의 또 다른 오랜 제자이자 동료였던 살라치와 그의 하인 바프티스타 데 빌라니스는 각각 레오나르도의 포도밭의 절반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은 땅을 받았고, 그의 섬기는 여인은 털로 된 망토를 받았다. 1519년 8월 12일, 레오나르도의 유해는 앙부아즈 성의 성 피렌체 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 살라시 또는 일 살라이노는 1490년에 조수로 레오나르도의 집에 들어갔다. 불과 1년 후, 레오나르도는 그가 적어도 다섯 차례에 걸쳐 금품을 훔치고 옷을 사는데 많은 돈을 쓴 후, 그를 "도둑, 거짓말쟁이, 고집쟁이, 그리고 식탐꾼"이라고 부르며 그의 경범죄 목록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그를 매우 관대하게 대했고, 그는 이후 30년 동안 레오나르도의 집에 머물렀다. 살라치는 안드레아 살라치라는 이름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쳤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마르코 도기오노와 볼트라피오 같은 레오나르도의 학생들에 비해 예술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살라치는 1524년 레오나르도가 사망할 당시 모나리자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유언에 따르면 모나리자는 505리라로 평가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죽은 지 20년 후, 프란치스코는 금 세공자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해 "이 세상에 레오나르도만큼 그림, 조각, 건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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