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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초기생애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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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기 생애, 1475-1488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오늘날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피렌체에서 소규모 은행가였지만 은행은 파산했고, 그의 아버지인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는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카프레세에서 잠시 관직을 맡았다.미켈란젤로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사법 행정가이자 포데스타 또는 키우시 델라 베르나의 지방 행정가였다.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프란체스카 디 네리 델 미니아토 디 시에나이다. 부오나로티 가문은 카노사의 마틸드 백작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미켈란젤로가 믿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지 몇 달 후, 가족은 그가 자란 피렌체로 돌아왔다. 1481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미켈란젤로는 유모와 그녀의 남편인 석공과 함께 세티냐노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대리석 채석장과 작은 농장을 소유했다. 거기서 그는 대리석에 대한 사랑을 얻었다. 조르조 바사리가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당신의 나라 아레초의 미묘한 분위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간호사의 우유와 함께 나는 끌과 망치를 다루는 요령을 배웠고, 그것으로 나의 형상을 만들었다.견습생, 1488-1492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는 인본주의자인 프란체스코 다 우르비노 밑에서 문법을 공부하기 위해 피렌체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교 교육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교회에서 그림을 베끼고 다른 화가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했다. 피렌체는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예술은 시뇨리아(시뇨리아)와 상인 길드, 메디치 가문과 같은 부유한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고전 학식과 예술의 재창조인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첫 꽃을 피웠다. 15세기 초,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고전 건축물의 잔재를 연구하면서 고전적인 교훈들을 구체화한 산 로렌초와 산토 스피리토라는 두 개의 교회를 세웠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는 미켈란젤로가 "낙원의 문"이라고 묘사한 침례당의 북쪽과 동쪽의 청동 문을 만들기 위해 50년 동안 노력했다. 오르산 미켈레 교회의 외부 벽에는 피렌체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 갤러리가 있었다. 도나텔로, 기베르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그리고 난니 디 방코. 오래된 교회들의 내부는 조토가 시작하고 마사초(Masaccio)가 브랑카치 성당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의 작품들은 모두 미켈란젤로가 공부하고 그림으로 베꼈다.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한 무리의 화가들이 피렌체에서 바티칸으로 불려와 시스티나 성당의 벽을 장식했다. 그들 중에는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작업장을 가진 프레스코화, 원근법, 인물화, 초상화의 대가 도메니코 기란다이오가 있었다. 1488년, 13세의 나이로, 미켈란젤로는 길란다이오의 도제가 되었다. 그 다음 해,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에게 예술가로서 돈을 지불하라고 길란다이오를 설득했다. 1489년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기를란다이오에게 그의 가장 좋은 두 제자를 요청하자, 기를란다이오는 미켈란젤로와 프란체스코 그라나치를 보냈다.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이 설립한 인문주의 아카데미인 플라톤 아카데미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의 작품과 전망은 마르실리오 피치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폴리치아노를 포함한 당대 가장 저명한 철학자 및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스텝의 마돈나 (1490-1492)와 센타우로스 전투 (1491-1492)의 부조를 폴리지아노가 제안하고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의뢰한 주제를 바탕으로 조각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베르톨도 디 조반니와 함께 작업했다. 그가 열일곱 살 때, 또 다른 제자 피에트로 토리치아노가 그의 코를 때려서,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에서 눈에 띄는 손상을 일으켰다.

 

볼로냐, 피렌체, 로마, 1492-1499

 

렌초 데 메디치가 1492년 4월 8일 사망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상황이 역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궁정의 보안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달에 그는 피렌체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 선물로 다색 목제 십자가(1493)를 조각했는데, 이 십자가는 교회의 병원에서 나온 시체들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해부하여 해부학을 공부한 몇 가지 사례 중 첫 번째 사례였다. 1493년과 1494년 사이에 그는 대리석 한 조각을 샀고, 실물보다 더 큰 헤라클레스의 동상을 조각했는데, 이것은 프랑스로 보내졌고 그 후 18세기경에 사라졌다. 폭설이 내린 1494년 1월 20일, 로렌초의 후계자 피에로 데 메디치는 눈으로 만든 조각상을 의뢰했고, 미켈란젤로는 다시 메디치 가문의 궁정에 들어갔다. 같은 해에 메디치 가문은 사보나롤라의 봉기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정치적 격변이 끝나기 전에 도시를 떠나 베네치아와 볼로냐로 이주했다. 볼로냐에서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작은 조각상 몇 개를 조각하는 임무를 맡았다. 도미니크, 그 성인에게 바치는 교회에서요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성 페트로니우스 대성당의 주요 문턱 주변에 야코포 델라 케르키아가 조각한 튼튼한 부조들을 연구했는데, 여기에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다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었다. 1495년 말 무렵, 피렌체의 정치적 상황은 진정되었고, 이전에는 프랑스의 위협을 받던 피렌체는 샤를 8세가 패배하면서 더 이상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사보나롤라 휘하의 새 도시 정부로부터 어떠한 위임도 받지 못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직장으로 돌아왔다. 피렌체에서 보낸 반년 동안, 그는 두 개의 작은 조각상, 즉 어린 성 베드로 대성전을 만들었다. 세례자 요한과 잠자는 큐피드. 콘디비에 따르면,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스코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가 그를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미켈란젤로에게 "그것이 묻힌 것처럼 보이도록 고쳐라"고 부탁하여 "고대 작품으로 여기고 훨씬 더 잘 팔도록" 하였다. 로렌초와 미켈란젤로 둘 다 중간상인에 의해 본의 아니게 작품의 진짜 가치를 속았다. 로렌초가 그것을 팔았던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각의 질에 너무 감명을 받아 예술가를 로마로 초대했다.  보수적인 피렌체 상황뿐만 아니라 그의 조각품을 해외에 파는 데 있어 이 명백한 성공은 미켈란젤로가 원장의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했을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21세의 나이로 1496년 6월 25일 로마에 도착했다. 같은 해 7월 4일, 그는 은행가 야코포 갈리의 의뢰를 받아 로마의 와인 신 박카스의 실물보다 큰 크기의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1497년 11월, 성좌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빌레르 라그라울라 추기경은 그에게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슬퍼하는 모습을 담은 피에타를 조각할 것을 의뢰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경 이야기의 일부가 아닌 이 주제는 중세 북유럽의 종교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추기경에게는 매우 친숙했을 것이다. 계약은 이듬해 8월에 합의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완공 당시 24세였다. 그것은 곧 "조각 예술의 모든 가능성과 힘에 대한 계시"인 세계 최고의 조각 작품들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사리(Vasari)는 "형식이 없는 돌덩어리가 자연이 육체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완벽함으로 전락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기적적인 일이다." 현재 성 베드로 대성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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