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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생애1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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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1471-1490)

1471년 5월 21일 알브레히트 뒤러와 바바라 홀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알브레히트 뒤러는 1455년에 헝가리의 귤라 근처의 아토스에서 뉘른베르크로 이주한 성공적인 금 세공자였다. 그는 주인 딸 홀퍼와 결혼했는데, 홀퍼 자신도 주인 자격을 얻었다. 알브레히트의 형제들 중 한스 뒤러도 화가였고 그의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알브레히트의 또 다른 형제인 엔드레 뒤러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금 세공의 명수였다. 독일식 이름 "뒤레르"는 헝가리어로 "아토시"(Ajtosi)를 번역한 것이다. 처음에는 "Trer"라는 뜻의 "Trer"로 헝가리어로 "ajts"를 뜻한다. 그 가족이 획득한 문장에 문이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나중에 뉘른베르크의 방언에 적응하기 위해 아버지의 가족 성 사전인 튀러를 뒤러로 바꾸었다. 뒤러의 대부 안톤 코버거는 금세공업을 그만두고 뒤러가 태어난 해에 인쇄업자와 출판업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가장 성공적인 출판인이 되었고, 결국 독일과 해외에 24개의 인쇄소와 다수의 사무실을 소유하게 되었다. 코베르거의 가장 유명한 출판물은 뉘른베르크 연대기로, 1493년에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에는 볼거무트 작업장의 전례 없는 1,809개의 목판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뒤러는 울게무트와 함께 있는 동안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중 몇 가지를 작업했을 수 있다. 뒤러는 자서전을 남겼고 20대 중반까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여러 문헌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뒤러는 아버지로부터 금 세공과 그림 그리기의 기초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금 세공인으로서의 훈련을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림에 매우 조숙한 재능을 보여서 1486년 15세의 나이에 미하엘 볼게무트의 견습생으로 시작했다. 은색 점으로 그린 자화상은 1484년(알베르티나, 비엔나)의 "내가 어렸을 때"로, 나중에 그의 비문이 말한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린이 그림 중 하나이며, 뒤러의 작품인 오푸스 원(Opus One)은 그의 작품을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울게무트는 당시 뉘른베르크의 주요 예술가였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 특히 책을 위한 목판화를 제작하는 큰 작업장이 있었다. 뉘른베르크는 당시 중요하고도 번영한 도시였으며, 출판업과 많은 사치스러운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이탈리아, 특히 알프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비교적 짧은 거리인 베네치아와 강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랑자르와 결혼 (1490-1494)

도제 생활을 마친 뒤, 뒤러는 방게자르를 데려가는 독일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랐는데, 이 관습은 도제자가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1490년에 떠났고, 아마도 북유럽의 대표적인 조각가였던 마르틴 쇤가우어 밑에서 일했지만, 뒤러가 1492년 콜마르에 도착하기 직전에 사망했다. 뒤러가 프랑크푸르트와 네덜란드로 갔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사이에 어디를 여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콜마르에서 뒤러는 쇤가우어의 형제인 금 세공인 카스파르와 바울, 화가 루트비히의 환영을 받았다. 1493년 뒤러는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니콜라우스 게르하르트의 조각상을 체험했다. 뒤러의 첫 번째 그림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은 이 시기에 그려졌으며, 아마도 뉘른베르크에 있는 그의 약혼녀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1492년 초, 뒤러는 금 세공인 게오르크의 또 다른 형제 마르틴 쇤가워와 함께 바젤로 여행을 떠났다. 1494년 7월 7일 23세의 나이로 뉘른베르크에 돌아온 뒤러는 아그네스 프레이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도시의 저명한 금관악사(그리고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의 딸이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한 자녀는 없었으며, 알브레히트와 함께 뒤러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아그네스와 알브레히트 사이의 결혼은 일반적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는데, 뒤러의 편지에서 알브레히트는 아내에 대해 극도로 거친 어조로 윌리발드 피르크하이머에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는 그녀를 "늙은 까마귀"라고 부르며 다른 저속한 말을 했다. 피르크하이머는 또한 아그네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녀를 어린 나이에 뒤러의 죽음을 도운 쓴 혀를 가진 구두쇠라고 묘사했다. 한 저자는 알브레히트가 동성애는 아니더라도 양성애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는 그가 동성애 욕구를 주제로 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와 매우 가까운 남성 친구들과의 친밀한 교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의 첫 여행 (1494-1495)

결혼 3개월 만에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것에 자극을 받아 홀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알프스를 여행하면서 수채화 스케치를 그렸다. 일부는 살아남았고 다른 것들은 그의 후기 작품에서 실제 장소의 정확한 풍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베네치아의 더 발전된 예술 세계를 공부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갔다. 볼게무트의 지도를 통해 뒤러는 쇤가우어와 집록 마스터의 작품을 바탕으로 드라이포인트로 판화를 만드는 방법과 독일식 목판화를 디자인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또한 독일에서 이탈리아 작품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가 이탈리아를 두 번 방문한 것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조반니 벨리니가 베네치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여전히 최고의 예술가라고 썼다. 그의 그림과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보여주는데, 특히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와 로렌초 디 크레디, 안드레아 만테냐가 훈련 중에 그의 작품을 만들었다. 뒤러는 이 여행에서 파도바와 만토바를 방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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